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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고자인지 초식남인지, 혹은 도 닦는 스님이 될 팔자인지. 자아정체성이 아직도 헷갈리는 이십대 머저리의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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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2. 00:29 읽고



전에 경복궁 탐방 후기에도 썼지만 나는 김훈을 매우 좋아한다.

자전거 여행같은 식의 글도 좋고 칼의 노래와 같은 식의 글도 좋아한다. 문체 자체에 차분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분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같은 책을 두세번씩 읽곤 하는데, 예외적으로 도저히 한 번밖에 읽지 못하겠던 책. 이상하게 읽을수록 내 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서 다시 책장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았던 현의 노래이다.

글이란 건 참 이상하다. 몇 줄 문장에 나는 까닭모를 서늘함을 느끼기도 하고, 웅대한 생각의 문제에 짓눌려 잠 못 이루기도 하며, 괴이한 일을 상상하며 써내렸을 작가를 상상하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글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읽지는 못해 글을 읽을 때 간혹 글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어려운 것들이므로 혹시 이러이러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만 내릴 수 있을 뿐이다. 누구든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자신의 글로서 타인에게 연결될 수 있는 깊이를 가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아니다. 그럼에도 '연결'이 가능한 능력을 지닌 사람의 수는 여전히 많고, 그 사람 하나하나의 손에서는 각기 다른 공간이 열리고, 각기 다른 사람이 숨을 쉬기에 아직도 글은 정의하기에 어려운 것이다.

김훈은 자신의 글로 타인을 연결 시킬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많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자신의 방식으로 새로운 공간을 열 수 있으며, 그 공간은 실재하는 것처럼 정교하여 생각의 무거움이 여실히 글의 모양에서 느껴져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내려간다. 언제고 그의 글을 읽으면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음을 느끼니 그의 연결은 나를 쥐고 흔들 수 있는 큰 길임을 알 수 있어 좋다.

쇠와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두 장인과 한 장수의 눈에서 풀어나간 현의 노래는, 사실 칼의 노래의 속편 쯤 되지 않을까 싶어 고른 책이었다.

두 장인이 가진 자신의 세계에 대한 탐구는 그 방식이 달랐음을 느꼈는데, 책의 끝에서는 서로 얽힌 듯 엮이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던 두 개의 다른 모양의 탐구가 장수에 의해 다른 방향의 길로 향한다. 확신과 부정, 독선과 포용의 차이가 그 둘에게는 있었다. 야로는 쇠의 흐름을 깨닫고 쇠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결국 쇠도 인간이 쓰는 한 인간에게 예속된다는 것을 알고서는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신과 다른 길을 통해 쇠로 향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륵은 덧 없는 소리를 계속해서 찾아 헤메었다. 소리는 살아있는 것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겼지만, 살아있는 것이 너무도 많고 제각기 다른 소리를 품었기에 그의 탐구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긴 미로였다.

그렇기에 우륵은 악기라는 소리를 다루는 물건만을 가지고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소리를 품은 그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답을 찾으려 했다. 두 장인의 차이는 아마 지속성에서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쇠는 백 번을 두드려 쇠도끼가 되건, 검이 되건, 깨어져버리건 녹여 형태를 잃건 실재함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힌다. 또한 그 사용처가 나뉘어 흩어져 자칫 쇠의 흐름을 좇다가 쇠의 목적을 본질로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야로는 쇠의 흐름을 좇다가 스스로 몰락하였다고 느꼈다.

소리는 실재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소리의 울림은 시간이 지나면 이내 흩어져 사라진다. 머리 속에는 떨림의 잔상이 남지만 전과 같은 소리는 존재할 수 없다. 우륵은 공(空)의 거대함을 깨닫고 조금이라도 소리의 울림에 가까워지기 위해 살았고, 한 나라와 나라 속의 왕국과 그 안의 사람을 담아 악기를 만들어내었다.

아마 그러한 차이가 두 장인의 우명을 가를 힘을 가진 이사부의 눈에는 보였던 것일테다. 이사부는 쇠의 흐름도, 소리의 흐름도 탐구하지 않았으나 생명의 흐름 속에서 살아갔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명의 흐름들을 접해온 장수는 그 큰 흐름과 맞닿아있는 쇠와 소리를 느꼈을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흐름을 따르려는 두 장인을 보았고, 달리 판단하여 둘의 길을 갈라놓았다.

인터뷰어와 작가의 대담은 일부러 읽지 않았다. 작가의 말에는 힘이 담겨 있을 것이므로 아직 정리되지 못한 내 생각이 작가의 말에 이끌려 휘둘릴까 두렵다.

같은 이유로 작가의 말도 읽지 않았어야 했지만, 두려움보다 말의 매력이 더욱 커서, 읽지 말아야 했음을 깨달은 것은 이미 모두 읽은 후의 일이었다.

아마, 작가는 언어의 흐름을 탐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내 방식으로 나와 맞닿은 흐름들을 알아가야 할 것이다.



현의 노래(김훈, 2004,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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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으앙아아앙
2013. 1. 10. 19:39 읽고



내가 표지때문에 읽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작품인데, 황석영의 작품임을 알아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내가 대학교 1학년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은 내가 정신적 고자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혹은 여자보기를 돌처럼 하게 될 스님과 같은 멘탈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기도 전의 이야기.

그저 남고에선 느끼지 못했던 처자들의,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향긋한 샴푸냄새와 청아한 웃음소리에 넋이 나가 세상은 생각보다 아름다운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적에 있었던 일인데, 내 친구가 자기 여자친구의 생일선물을 사러가자며 나를 끌고 나왔을 때다.

우선은 돌아다녀보자며 길을 걷던 놈은 돈도 없는데 책 선물을 해줘볼까 하면서 서점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눈에 띈 책이 바로 『개밥바라기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그 놈은 그 자리에 서서 책을 몇 번이고 들춰보았더랬다. 내가 혼자 돌아다니면서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뽑아왔을 동안 계속 그 자리에 서있기에 이 걸 선물할 생각이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선물 살 돈으로 내가 읽어야겠다 그냥.'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각종 기념일에 무덤덤한 나는 서로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할 수 있는 게 연인이라니까...? 라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갔고, 당연히 며칠 후 내 친구는 여자친구와 무지막지하게 싸우고 이별의 위기를 겪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렇게 내 기억 한 구석에는『개밥바라기별』이라는 소설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년쯤 지났을까? 어떤 계기로 인해 폭풍 독서를 다시 시작했을 때에 이 책을 도서관에서 보았다. 나는 니체의 빌어먹을 짜라투스트라를 이해하는 고상한 시민이 되겠다는 허세 가득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던 참이었기에, 표지만 보고 가벼운 내용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고, 읽었고, 뭐 그렇고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옴니버스 식이 뭐냐? 유준의 성장소설이랬지만 고민하는, 그러면서 자라나는 나무들의 이야기.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자라나는 나무들은 서로 얽히기도, 얽힌 가지를, 아니 덩쿨이 낫겟다. 어쨋든 그렇게 자라난다.

준이는, 그네들은 전쟁을 민주화를 체감하며 자라난 내 기억속 청년학도 그대로의 이미지로 시작했다가, 많은 고민과 여행과 사람과 생각을 거쳐 사연 많은, 눈빛이 깊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영역을 기억하고, 지켜내면서 타인의 영역 속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들은 깊은 눈을 가졌으니까.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

인호와 또 정수와 무전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세상 구경하고 다니던 때의 준이도 좋았지만(사실 정수의 그림. 뱃전에서 바다를 눈으로 가슴속에 담고 있는 인호와 준이를 그려내던 정수의 모양이 상상되서 좋은 것이었다.), 대위를 만나 대학생이라는 딱지를 떼고 그저 한 명의 어른으로 노가다를 하며 돌아다니던 준의 이야기가 더 좋았다. 왜나. 생각 해보면 큰 고민 없이 앉아있던 자리 마음껏 엉덩이 털고 일어나 세상의 또 다른 장면으로 향해 훌훌 갈 수 있는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지. 그때부터는 진짜 한량처럼, 외로워 보였으니까. 배따라기. '너 어떻게 여기 완?'

대위처럼 세상 돌아가는 일 꿰찬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우선 돌아다녀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드네.

사람은 누구든지 오늘을 산다. 오늘은, 오늘이니까 종잡을 수 없다.

그래서 힘겹지만, 항상 힘겹지만은 않으니까 살 수 있다. 언젠가 다가올 또 다른 오늘, 나는 웃고있을까.

'헤어지며 다음을 약속해도 다시 만났을 때는 각자가 이미 그때의 자기가 아니다. 이제 출발하고, 작별하는 자는 누구나 지금까지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오늘을 산다. 서로의 오늘은 서로가 만나는 순간 얽혔다가 헤어지는 순간 풀린다. 그리고 얽혀있던 자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옅어지고, 얽혀 있을 때의 자기를 그 자국을 더듬으며 떠올려 보자면, 이미 지금의 나는 그때의 자기가 아니니까, 어렴풋이 짐작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자국이 많은 덩쿨이 될 테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심지만큼은 계속해서 감싸고, 보고, 기르고 해야 될테다. 그래야 내가 나인채로 다른이들의 덩쿨에 얽히고 또 내킬때는 풀고 다른 숲으로 마음껏, 언제든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워하는 그 모든 덩쿨 자국을 기억하면서.



개밥바라기별(황석영, 2008,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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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으앙아아앙
2013. 1. 8. 15:52 읽고

책표지는 민음사에서 출판한 것으로 선택. 저작권 문제를 여전히 잘 모르겠으니 문제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앙망하오며



주인공 이름?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추악함과 나약함을 안고 끙끙대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 대한 사랑(에로스 말구...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라남을 인지하며, 그 사실에 괜히 화를 내는 멍청이가 화자니까. 그냥 나랑 비슷한 새끼. 라고 생각하면 떠올리기 편하겠네.

 

소심함. 나약함에 대한 인지와 그로 인해 가지는 강함, 인기, 웃음 등에 대한 갈망. 하지만 손에 쥘 노력조차 자신의 추악함을 핑계삼아 포기하고 마는, 얼간이.

 

앞의 주절거림은 쓰레기다. 창녀에게 심리적, 지위적 우월감을 가져 분수 넘치는 조언을 해주어 영웅이 된 듯한 기분을, 매일 같이 다른 강자(심지어 제 하인에게도 멸시받는 불쌍한 작자!)들에게 치여, 자꾸만 굽어지는 허리와 움츠리게 되는 어깨를 부여잡고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에게 그런 기분을 한순간이나마 느끼게 해준 리자라는 창녀가 나오는 시점부터가 진짜배기.

 

소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난 소심하니까 안 그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알 수가 없으므로.

소심한 이들이 으레 그렇듯 화자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만의 공상에 빠진다.

'이렇게 내가 자비와 관용이라는 사랑을 베풀었으니 응당 가엾고 더러운, 하지만 지성은 있어보이는 이 창녀는 내 앞에 무릎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발등에 입을 맞출테지' 같은 생각을 하며 쾌감을, 그리고 동시에 초조함을 느끼는 화자. '진짜 그렇게 하면 어떡하지?'

 

냉소주의, 염세주의는 나약함의 상징이라고 본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는 나약함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상처를 아물게 해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지려 할 만큼의 인내심도,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상처입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세상을 차갑게, 혹은 지겹게 바라본다. 타성이라는 질척거리고 깊은 늪속에 몸을 숨겨버린다. '그럴 줄 알았지, 나같이 고결한 존재가 살기에 세상은 너무도 우매하도다.' 이게 냉소와 염세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이런 놈들을 볼 때 인상을 절로 지푸리게 되는 것은,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늪의 악취를 맡았기 때문이다. 상상과 자기만족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만치 썩었기에 근처에만 가도 맡을 수 있는 고-약한 악취.

리자에게서 작은 승리감을 느끼고 늪의 얕은 부분으로 나왔던 화자는,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을 리자에게 들키고 만다. 가엾은 사람.

지성, 자애로움을 가장했던, 그래서 우월함을 느끼던 화자는 추락하는 기분을 느꼇을 것이다. 또다시 상처입은 얼간이는 발악한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자신을 상처입힌 창녀에게, 그리고 순간의 승리감에 들떠 방심했던 어리석은 자신에게.

자신을 벌하는 의미로 지하로 들어갔을 테다. 늪보다 단단한, 그리고 더 깊은 방공호 속에 자신을 유폐시킨 채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냉소로 가장해 글로 적고, 홀로 승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상이 눈앞에 있지 않으므로 항상 승리하는 덧없는 공격.

마지막에 글을 중단한다고 쓰여는 있지만, 이후에도 더 적혀 있다는 것을 보면 끝까지 그 승리의 덧없음을 느끼지 못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글을 마치고 지하에서 나간 화자는, 덧없음을 느끼고 지하에서 나간 것일까? 늪을 걷어내고 상처를 아물게 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는지, 혹은 새로이 입은 상처를 부여잡고 다시 지하로 돌아와 징징거리고 있을지는. 다음에 다시 이 책을 읽을 내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돌아와 책을 잡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도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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